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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면 지명유래

이산면의 리별 지명유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리별 유래
원리
  • 돗밤실(栗谷) : 이조세종때 안동 권씨가 이주하였으며 당시 밤나무가 많고 밤이 많이 생산되었다하여 율곡(栗谷)이라 함
  • 한성골(漢成골) : 漢城左尹을 역임한 鄭道復이 이곳에 와서 살았으므 로 그때 사람들이 동명을 漢成동이라하여 지금에 이름
신암리
  • 삼봉골 : 마을의 지세가 마을을 중심으로 좌,우후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각봉이 우뚝솟은 봉우리여서 삼봉골(三奉골)이라 함
  • 우금(友琴) : 1520년경 漢成府愿尹을 역임한 金友益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開拓당시 마을의 지형이 앞산줄기와 뒷산 모형이 거문고를 치는 형상이라하여 칭함
  • 신기(新基) : 李朝時는 未岩面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미륵당. 새마을. 샛터松골을 합하여 칭함
지동리
  • 탑골(塔골) : 신라시대로 추정되는 玉麗菴이라는 사찰이 있었다. 전해지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형적만이 남아 있음
  • 일우실(逸遇室) : 이조중엽 全宅弘이라는분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앞에 개울이 흐른다 하여 이후라고 칭하기고 하며 全奎炳장이 세운 逸遇亭의의 停號 가 洞名되어 칭함
  • 저수골(長水골) : 1580년대 달성 서씨 둔암선생의 후손들이 생활을 避하여 伊溪上葛 田洞에 거주하다가 고을이 협소하여 긴계곡에 평탄한 곳에서 마을을 개척하였다하여 長水洞이라 함
석포리
  • 번개 : 이조선조시 명신 김록선생의 晩年 은거지로서 영주 동쪽에 흐르는 하천을 배경삼아 東浦라고 칭하다가 그 후손 義禁府都使 번개공이 동천(現乃成川)을 돌려 치수함으로써 계(浦)를 돌렸다고 하여 반포라 일컬어지면 또한 선생의 호 번개를 따서 칭함
  • 흑석(黑石) : 동리입구에 검은 바위가 있어 黑石마을이라 함
용상리
  • 배해(背海) : 약1500년경 최임수라는 선비가 임진왜란을 피해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정착하였으며 마을의 지세가 높은 편으로 동에 내성천, 서에 서천이 흘러 동서로 물을 안고 떠있는 배와 같다하여 칭함
  • 어우실(御位室) : 연대는 알수없으나 임금님이 하룻밤을 머무르고 갔다하여 칭함
신천리
  • 내매(乃梅) : 晋州 姜氏 조상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최초로 마을을 개척한 곳으로 梅花落地라하여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면 가축은 매화꽃처럼 물위에 떠올랐다가 떠내려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음
  • 새해(新海) : 당초 月城 孫氏 선조가 동천면(乃城川) 출천동이라는 동리에 살았으나 수마로 인하여 재를 안고 새해로 이주하였으며 새해라 함은 수마를 피해 높은곳에 자리한 동리인지라 안개가 끼면 마을 아래로 바다와 같이 보이므로 새해라 하며 또, 하나의 전설은 새해가 아니고 沙海라고하는대 동리에서 내성천 을 보면 모래바다를 이룬다하여 칭하지고 함
운문리
  • 귀통골(貴通골) : 옛날 이곳에 산적이 출몰하여 가산을 도적질해 감으로 이를 금지하기 위해 마을의 개울로 귀한손님이 다니면 통과시키지 못하게 한 연유로 貴通골이라 함
  • 돌트미 : 옛날 이곳에는 돌이 많으며 돌사이에 틈이 많다 하여 칭함
두월리
  • 두들 : 이마을은 두메산골이었으나 내성천 연안을 낀 넒은 들이 있어 두들이라 칭함
  • 해맬(湖梅) : 예날에는 마을의 중앙을 흐르는 개울물이 호수처럼 맑고 깊어 매화가 호수 위에 떠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라하여 호매라 칭함
내림리
  • 바같수구리 : 1600년경 연일 정씨가 윤실일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이 마을터가 연화정수라 하여 기와집을 짓거나 펌프를 박으면 화를 입는다는 전설이 있어 새마을 사업이 뒤떨어진다. 수구리라함은 내성천이 이 마을을 감돌아 흐른다하여 연유된 동명이다
  • 안수구리 : 1600년경 반남 박씨 문중에서 박승임 선생의 묘를 이곳에 모시고 그 후손이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내성천이 마을을 감돌아 흐른다하여 수구리라 함
페이지 담당자이산면 임현규 ( 054-639-7445 ) 페이지 수정일 : 2018-08-01 만족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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