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헌안향 (晦軒 安珦, 1243~1306)

처음 이름은 유(裕)요, 후에 향(珦)으로 고쳤으며 회암 주희(晦庵 朱熹)를 흠모하여 스스로 호를 회헌(晦軒)이라 했고 본관은 순흥이며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안향선생은 소백산 정기를 받고 태어나 순흥이 배출한 위대한 인물이며 우리나라에 중국 주자학(朱子學)을 최초로 보급하여 우리나라에 유교의 토대를 만들었다.

16~18세 때에는 숙수사를 왕래하면서 독학으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1260년(원종1년) 18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 개성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6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도첨의 중찬(都僉議中贊)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명관(名官)이었다.

1289년(충렬왕 15년) 11월에는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어 왕과 공주를 호위하며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와 공자, 주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이듬해 3월에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이후 1303년(충렬왕 29년)에는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 을 중국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72제자의 화상, 문묘에 사용할 제기, 악기와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서(四書), 주자서(朱子書)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1304년 6월 국학의 대성전이 완성되자 거기에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문묘의 제도를 갖추게 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육영재단에 해당하는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해 장학사업을 펼쳐 인재양성을 장려하고 성리학보급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한편 선생이 살던 고려후기는 불교의 폐해와 무인(武人)의 장기집권 및 몽고 침입과 홍건적 난 등 이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국운쇠퇴기였다. 이러한 때에 안향 선생은 중국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도입해 새로운 학풍으로 어지러운 통치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안향 선생의 이러한 노력으로 마침내 주자학을 수양(修養)과 치세(治世)의 원리로 삼은 성리 학자들 중심으로 되어 훗날 조선을 개창하게 되고 조선이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민족의 스승으로, 동방 도학(道學)의 비조로 추앙받게 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訥木里) 구정동(口井洞)에 있다.한편 1917년에는 중국 공자의 77대손인 공덕성(孔德成) 씨가 회헌 안향선생을 ' 안자(安子)' 로 높이 찬양하여 지은 찬문과 안자묘(安子廟) 편액친필글씨를 보내왔다. 또한 공자의 76대손인 공영이(孔令貽)씨는 회헌 안향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보내왔다. 공덕성씨와 공영이씨가 보내온 안자묘 편액친필글씨와 회헌 안향의 신도비명은 1977년 경기도 시흥시 의왕읍에 안자묘 건립과 함께 그곳에 보존되고 있다.

성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공자이시고
현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주자이시고
공자와 주자를 조종으로 삼아 동방성리학을 집대성한 분은
고려의 안자(安子: 안향 선생을 높여 칭한 말)이시다.
( 集群聖之大成者孔子也 )
( 集群賢之大成者朱子也 )
( 祖孔宗朱以啓東方之聖學者安子也)
- 중국 공덕성씨가 안향선생을 찬양한 찬문 全文

근재안축 (謹齋 安軸, 1287~1348)

고려말기 문신.
고향죽계(竹溪)를 세력기반으로 하여 중앙으로 진출한 신흥유학자(新興儒學者)로 재능과 학문이 뛰어났다,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순흥(順興).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 사헌규정(司憲糾正)을 지내고 1324(충숙왕 11) 원(元)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개주판관(蓋州判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 성균학정(成均學正)을 거쳐 충혜왕(忠惠王)때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로 파견되었으며, 이 때 충군애민의 뜻이 담긴 "관동와주 關東瓦注"를 남겼다. 1332년(충숙왕복위 1) 판전교(判典敎), 지전법사(知典法事) 재직시 파면당했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되었으나 내시의 미움으로 받아 파직되는 등 파면과 복직을 되풀이하였다. 충혜왕이 복위한 뒤 다시 전법판서, 감찰대부(監察大夫)에 등용되었으며, 상주목사(尙州牧使),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등을 지내고 1347년(충목왕 3)에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量田) 행정에 참여했다.

그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등과 함께 고쳐 엮었고, 충렬, 충선, 충숙 3조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關東別曲), 죽계별곡 (竹溪別曲)을 남기는 등 학문과 문장이 높았으며 저서에 근재집 (謹齋集)이 있다.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진 뒤 죽어 배향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안보 (安輔, 1302~1357)

고려말기 문신.
자는 원지(員之), 본관은 순흥(順興).
안축(安軸)의 동생으로 1544년(중종 39)에 함께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320년(충숙왕 7) 문과에 급제하고, 경주사록(慶州司錄), 수찬, 편수관등을 지냈다. 1345년(충목왕 1) 원(元) 나라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요양행중서성조마겸승발가각고(遼陽行中書省照磨兼承發架閣庫)로 있다가 귀국한 뒤, 전법판서(典法判書), 동지공거(同知貢擧), 정당문학(政堂文學), 동경유수(東京留守)등을 지냈다.
이색(李穡)은 묘지에서 "선생은 성품이 활달하고 사기를 즐겨 읽었으며 일함에 있어 대세(大勢)를 따라 조금도 치우침이 없었고 화려함을 버리고 뜻을 전달함을 취할 뿐 이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신재 주세붕 (愼齎 周世鵬, 1495 ~ 1554)

주세붕 선생은 조선시대 석학이며 도학자로 호는 신재(愼齋), 본관은 상주(尙州), 시호는 문민공(文敏公)이며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의 시초인 백운동서원의 창건자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漆原)면 출생으로 1522년(중종 17) 생원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한 뒤 정자(正字)가 되고, 검열(檢閱)·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다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고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좌천되었다.

주세붕 선생은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37년) 평소 흠모하던 고려말의 학자 안향선생을 주향하고 향촌교화를 위해 안향선생이 어린시절 수학했던 숙수사 터에 서원을 건립한다. 서원을 통하여 사림을 교육하고 아울러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 하려는 목적으로 유생들과 강론(講論)하는 등 열의를 보였다. 주세붕 선생이 이곳에 사묘를 건립한 것은 안향 선생의 영정을 모셔오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1456(세조 2년) 9월 순흥에 유배된 세종의 다섯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 (李甫欽, ?-1457)의 단종 복위 밀모사건으로 1457년 순흥도호부가 폐지되면서 풍기군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고, 이에 순흥향교가 폐쇄됨에 따라 안향 선생의 영정은 서울의 순흥안씨 대종가로 옮겨져 봉안되기에 이른다.

이와 관련하여 주세붕 선생은 "공의 영정이 순흥도호부 향교에 봉안되었는데, 정축(丁丑,세조3)의 변고로 순흥부가 없어지자 한성의 대종가로 옮겨 봉안하였다. 내(주세붕)가 공의 종손 안정의 집에서 공의 영정을 본 적이 있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엄연하고 가까이 다가서면 온화하니 진실로 대인군자의 용모로서 생전의 모습을 친히 보는 듯하여 마음속에 길이 간직하고 있었다....." 라고 『회헌선생실기(晦軒先生實記)』에 기록하고 있다.

이후 주세붕 선생은 1544년(중종 38년) 8월 11일 창건된 백운동에 안향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죽계사」3장을 낭독하며 경건히 제례(祭禮)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쪽에 죽계수 서쪽에 소백산 그 사이에 공을 모신 사당
백운이 가득찬 골짜기에 앞 길이 희미하네,
시냇물에는 고기 놀고 산에는 잣나무
여기는 공이 놀던 옛 터인데 어이하여 돌아오지 않으시나,
돌아와 주오 돌아와 주오 나를 슬퍼잖게
서쪽에는 소백산 동쪽에는 죽계수 산 위에는 구름
강물에는 달빛 고금에 변함 없네
공이 오실 적에는 옥규를 타고,
더러는 난조를 타고
나의 술잔을 드시고 나의 정성에 흠향하시어
기쁨을 다하소서.
공이 옛적 낳기 전에 유도가 어두웠고
윤리가 땅에 떨어져 구름 연기에 쌓인 황혼이었네
공이 나신 후로 삼한이 일신되어
푸른 하늘 태양처럼 의리의 도가 높여졌네
훤출한 사당에 공의 영정 봉안되니
죽계수는 더욱 맑고 소백산은 더욱 높아.

또한 주세붕 선생은 백성을 위하는 후덕한 목민관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백성들이 나라에 바치는 산삼 때문에 어려움이 많은 것을 알고 소백산에서 산삼종자를 채취하여 인공재배를 장려, 풍기 땅에 재배삼을 처음으로 성공시킨 인물이다.
이러한 주세붕 선생의 선정(善政)을 기리고자 훗날 관아 앞에(현 풍기읍사무소 내) 보기 드물게 선정비를 세웠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주옥같은 글을 많이 남겼는데 시가(詩歌) <도동곡(道東曲)> <태평곡(太 平曲)>을 비롯 『죽계지(竹溪誌)』 『무릉잡고(武陵雜稿)』 등을 대표적인 저술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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