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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 백동 희여골 창원황씨 문중에  전해지는  수절을 지킨  제비의 기이한 사연
  • 등록일2022-07-07
  • 작성자 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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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제비

이 이야기는 경북 영주시 풍기읍 백리  희여골 마을에서  1595년부터  1611년 사이에  실제 있었던 사실입니다.   절개를 지킨 제비의 사연은  고금동서남북  전 세계적으로도  듣기 어려운 기이한 내용입니다.
 남편 제비가 죽자 절개를 지킨 과부제비와  최여옥할머니의 절개와 의리를  담은 내용입니다. 

때는  1588년  한양의  종묘 오른쪽 동네인 이화동에서 살다가  70세가된  황노인은  벼슬을 그만두고 풍기 히어골로 내려왔다.  그곳은 할아버지의 고향이었다.
정부인 여흥이씨는 51세에 세상을 떠나고   후실 최여옥을 부인으로 맞아서
고모부가 살다가 돌아가시고  비어 있는  초가집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살았다.  사랑채가 있어서 정암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가산을 털어서  군량미를 마련하여  전서에 보냈다.
선조임금은 그 공을 높이사서 1594년  종 2품 동지돈녕부사를 제수 했다.
그리고 영주의 항병대장이 되었다. 왜놈들이 아직 물러나지 않아서 항상 나라 걱정에 걱정에 노년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봄이되자  남쪽나라에서  제비한쌍이 날아와서 추녀밑에  둥지를 틀고 살았다.

제비들의 지지배배 소리는  선잠을 깨우기도 하였지만  시골생활의 여유로움을 느끼면서 살아가던중  숫제비가  고양이에게 물려 죽었다.
암제비는  구슬피 지지배배 울면서  주변을 맴돌며 슬피울었다.

남편제비를 잃은 암제비는 같이 살던  둥우리에서 살지 않고  혼자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제비집을 지었고  그 둥지의 아래는 구멍을 뚫어 놓았다.
구멍을 뚫어 놓은 이유는  남편 제비가  죽었는데 정절을 지키겠다는 표시였다.  혹시 다른 숫제비들에게 겁간을 당하더라도  구멍으로 알을 떨어뜨려 새끼를  기르지 않겠다는  죽은 남편 제비에 대한 의리였다.
황노인은 1598년  자식들을 모아 놓고  아직 왜놈이 물러가지 않았느냐고
묻고 한탄하며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최여옥은  나이차이도 많이 나는 남편이었기에  청상과부가 되었지만  그곳을 떠나지 않고  혼자 살았다.
가을이 되자  제비는  남쪽 나라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되자  지지배배 우는 소리를 들으니  지난 가을에 떠났던
제비가 홀로  돌아와서  그 작은 둥우리에서  남편제비를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최여옥은  제비에게  손을 내밀자  제비는 손등에 앉았다.

이렇게  최여옥은 봄이면  찿아오고 가을 이면 떠나가는 제비와 살아가다가
집이 너무 크서 혼자살기 외로움을 느낀  최여옥은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기이하게도  제비는  최여옥이  있는 집으로 와서 또 작은 둥지를
짓고 살면서  다른 숫제비들이  다가오면  싸우면서 좇아보냈다.
오직 최여옥만이 부르면 손등에 앉고 따랐다.   한두해에 그친 것이 아니라
무려 16년이나 제비는  봄이면 날아오고  가을이면 떠나갔다.

인간과 제비의 수절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는   이황의 제자 정탁의 문인인
식암 황섬이  의연시를 지어서 식암문집에 실어두어서 알려지게 되었다.  

황노인은  중종때 우찬성을 지낸  황사우의 둘째 아들로서  한양의 종묘옆 이화동에서 태어나서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경유 주세붕과 퇴계이황과 문인으로서  알성급제후 청도군수등 여러 벼슬을 하다가 70세가 되어서  나는 이미 늙었도다 한탄하며 할아버지의 고향인 영주시 풍기 히어골로 내려와 여생을 마친  송간공 황응규이며  어린 나이로  나이많은 초로의 남편에게
출가하여  자식을 낳아 기르지 않고  살아온  최여옥의  의리있는 삶이지만 슬픈 여인의 이여기입니다.

식암 황섬은  의연시를  암제비의  남편제비에 대한 의리있는 제비의 일생을
미물제비가  어찌 아름다운 덕의 소중함을 알랴마는  정성 지국한 원조에
저절로  온각 곤충이 감동할세    위풍도  이렇듯  의리를 지킴이  강호의 한량 같았고  침 뱉어도  혼인할 생각  하늘의 무지개 같았건만   별채에 있는 작은 움집에  일편단심  매달려 있으니   삼가서 잠시도  훼손 못하게  떼진 아이들 경계했네,  예전에 계시던  이씨어머니와  뒤의 어머니까 앞과 뒤에서  함께 부합됨은 하능리 내린 충정일세~
하고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인조시대 1633년  조정에 상소되어  제비와 최여옥의 굳은 절개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라하여  조정의 특명으로  같은해 12월에  군수 김상윤이  정려각과  절무문을 세웠다.
그후 한 대 이마을은  절부촌이라 불리웠다.  


의로운 제비(義燕)에 대한 시. 아울러 서문을 썼다
                                               지은이 황섬(黃暹)
나의 서모庶母이신 최씨崔氏의 어진 행실은 가히 다 기록하지 못한다.
 부친께서 생전에 계실 때부터 한 자웅의 제비가 있었는데 서모가 
거처하는 방 밖에다 스스로 둥지를 틀어 살고 있었으나 한 마리 제
비가 고양이에게 물려죽음으로 남은 한 마리 제비는 둥지를 돌며 슬퍼
하는 듯 재잘거렸었다.

가을이면 홀로 떠나갔다가 봄이면 홀로 돌아왔는데 서모가 홀로 되서
별채의 집으로 이사하자 이에 제비도 따라서 이사하여 별채의 처마에
둥지를 틀었다. 

둥지는 좁게 틀어 겨우 반신만 용납되었고 이에 그 밑바닥엔 구멍을 내었는데 이같이 함은 홀로 살겠다는 표시로 다른 제비와 어울려 다시는 알을 낳아 새끼를 까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또한 둥지를 작게 틀었는데 기둥의 머리와 고삭 끝에 한입의 동전처럼 단지양다리만 걸침이 용납容納되도록 작게 틀었고 이렇게 함은 다른 제비와 앉아서 어울리지 않으려 함이었다. 

또 손님제비가 자기가 살고있는 곳에 가까이 날아온 즉 반듯이 고전苦戰하면
서도 쫒아 보냈으나 유독 주인인 서모만을 믿고 따름으로 부른 즉 번번이 손 바닥 위에 내려와 앉았으니 이런 사건은 드물고 기이했기에 의로운 제비에 대한 시를 짓게 되었다.
페이지 담당자문화예술과 김도훈 ( 054-639-6562 ) 페이지 수정일 : 2023-08-16 만족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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