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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영주 향병대장  황응규( 풍기 희여골)
  • 등록일2022-07-07
  • 작성자 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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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응규(黃應奎) 
임진왜란 당시 영주 향병대장

황응규는  1518년 한양 이화동에서 출생했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주세붕과 이황의 제자가 되었다.  1543년  알성급제하여  청도군수
단양군수를 지내는등 벼슬을 지냈고,  

1576년부터 청도, 단양군수 재직 시절  휴가를 얻으면  아버지의 고향인 희여골의  꼭대기에 중산재를 짓고,  고모부 정자전께서 거주 하시던 정암정사에  머물럿었다.  

그리고 나는 늙었도다 하며 1588년 70세의 연세로  벼슬을 그만두고  희여골로 내려와 고모부가  사시던 정암정사에 살았다.

정암정사의 왼편에는  방 2개 마루와 부엌이 있는 생활거주지 였고
정암이라 현판을 붙인 곳은 사랑채였다.

황응규는  희여골에서  생활하며  소수서원에서  유림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전수했고,   
소수서원내에 동몽재(현 학구재)를 지어서 어린 학동들의 교육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대에 물려받은 재산과 가산을 정리하여
전선에 군량미를 보냈다.

아들 황섬은 4월에 募運使가 되어 宣祖를 모시고 松都, 平壤, 寧邊으로 가다, 6월에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동궁인 광해군을 모시고 江界로 향하다.  假承旨가되고, 12월에 寧邊에 도착하다.  1593년 1월에 동궁 광해군을 모시고 定州에 가 선조를 알현하였고,  4월에 선조를 모시고 安州에 가다가 호조 참의가 되다  
10월에 선조를 모시고 海州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다.

이같이 군량미를 보내자  1594년 4월  선조는  군량미를 바친
공으로  동지돈녕부사 종 2품을 제수하였다. 

소수서원 유림에서는 황응규를 향병대장으로 추대하였고  1598년 7월  정암정사에서  운명을 달리할 때 자손들을 불러 놓고  아직 왜놈들이 물러가지 않았느냐 묻고 탄식하며  별세하였다.


모든 재산을 군량미를 마련하여  전선에 보내니  삶이 어려워졌다.  후일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아들 정익공 황섬은  아버지가  작은 집에   가난하게 사시는 모습에  늘 안타까워했다.

현재 풍기 백동에  황응규가 살던 흔적이  남아있다. 2평정도 되는  정암정사이다.    

평해황씨 황준량 보다 1살 이래인  황응규는  퇴계 이황의  제지 였다.   황준량은  퇴계가  살아생전에
사망하여 퇴계는  황준량을 목민관으로 높게 평가했으나   황응규는  퇴계 사후에  청도와 단양에서 목민관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래서  퇴계의  평을 받을 수 없었다.

황준량은  영주에 기여한 사실은 없다.  그러나 황응규는   소수서원에  동몽재(현 학구제)를 지어서  학동들의 교육에 힘썼고,   임진왜란 당시 소수서원의  추천으로  향병대장되어  왜놈들에게서 조선을 지키는  영주를 지키는 정신적 지주역활을 했다.
페이지 담당자문화예술과 김도훈 ( 054-639-6562 ) 페이지 수정일 : 2023-08-16 만족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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