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광리(金光里)는 조선(朝鮮) 세조(世祖)때에 적개공신(敵愾功臣) 장말손(張末孫)의 후손 사계(砂溪) 여화(汝華 : 1566 ∼ 1621)가 이곳에 터를 잡아 세거하여 후손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이 가옥은 사계의 육세손(六世孫) 태득(泰得)(1741∼1792)의 고택(故宅)으로 그의 손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증직(贈職)된 연구(衍矩)(1802∼1892)가 건축하여 영감댁(令監宅)이라 불러오고 있다. 이 건물은 마을 뒤 단산(壇山)을 배경으로 하여 좌측에 가랑봉, 우측에 불로봉을 거느리며 내성천(乃城川)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口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안대청만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다。지붕은 사랑채만 옆면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고, 나머지는 안채와 양익사(兩翼舍) 순으로 단의 차이를 두고 옆면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19세기 중반의 건축임에도 지형(地形)과 지세(地勢)에 맞게 가옥을 동북향(東北向)으로 안치(安置)하여 전통적인 배치법을 고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