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춘정 기문(記文)에 따르면 영주 이산면 신천리 새해 마을에 거주하게 된 것은 경주손씨 12세 동익(東益)이 영천의 새해〔新海〕로 이주하여 살아오면서였다. 그 후손 17세 경락(號 : 新月)과 유락(號 : 晩春) 형제분이 독서, 수양, 강학, 취미하던 별실이 있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침수, 도괴되자 신월의 후손 정달과 윤수, 만춘의 후손 연달이 이건하고 족손(族孫) 후익을 찾아 기문을 부탁하였다. 백숙(伯叔)간의 방을 중수한 만큼 확실한 주인이 없으니 월춘정이라 함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으며, 이로서 형제의 화합과 일족(一族)의 흥성을 기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해천잡초에 따르면 “월춘정중건시개기고유문(月春亭重建時開基告由文)”에 후손 윤수가 무인(戊寅)년 2월에 토지신에 고유한 것으로 보아 월춘정의 중건은 1938년임을 알 수 있다.
1938년에 중건한 건물로, 건축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별다른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형태의 정자이나 영주다목적댐 건설로 사라져 가는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수몰민들의 정서 등을 반영할 수 있도록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