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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1980년 4월 1일 법률 제3188호에 의거 영주읍 영주6리 를 통합하여 영주시 영주4동으로 행정구역 개편
  • 1998년 10월15일 도 · 농 복합으로 영주4동에서 영주2동 으로 행정구역 개편(영주시 조례 제267호)
  • 2021년 7월1일 가흥1동 일부, 휴천2동 일부 통합(영주시 조례 제1347호)

지명유래

영주2동의 지명유래 내용을 리별, 유래 순으로 정리한 표입니다.
지명 유래
구성공원(龜城公園) 구성새마을금고 앞 골목을 따라 가면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당 절 뒤편에 낮은 산이 있는데, 이곳을 『구성공원』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각 고을마다 성(城)을 쌓도록 하여, 당시 영천 고을에서는 이 봉우리를 요충지로 여겨 흙과 돌로서 성을 쌓았는데, 이 산형상이 마치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거북이 구(龜)자를 써서『구성산성(龜城山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공원의 동남쪽 경사진 벼랑에는 그 옛날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태종 때에 구성산성의 이름을 따서 고을 이름을『구성(龜城)』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영천군지에 의하면, 당시 성의 둘레는 1,281척, 높이는 9척 이었으며, 성 안에 우물이 하나 있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고, 또한 무기를 보관하는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왜정시대에 일본이 각 고을마다 민족의 역사적인 유적지의 의미를 잊게 하기 위하여 공원(公園)이란 이름을 붙여서 놀이터로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공원 가학루 남쪽 기슭에 진주강씨 집안의 오래된 무덤이 있는데, 이곳이 와우형(臥牛形)으로 구성산성의 남쪽 봉송대 방향 산줄기가 소의 머리이며, 이 무덤이 소의 배에 해당하여 소가 포근하게 누워있는 명당터로 알려지고 있다.
공원 아래에 있는 포교당 입구에서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에는 조선 고종 임금의 장인인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 영천군수(榮川郡守)의 유애비(遺愛碑)외 다섯 점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삼판서 고택(三判書 古宅)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세 분의 판서가 연이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주택의 첫 주인은 고려공민왕 때 형부상서(조선시대 형조판서)를 지낸 정운경(1305~1366)으로, 정운경은 사위인 공조판서 황유정(1343~ )에게, 황유정은 다시 사위인 영유현령 김소량(1384~1449)에게 이 고택을 물려주었는데 김소량의 아들 김담(1416~1464)이 이조판서에 올랐다. 이때부터 김판서의 후손들이 이 고택에서 대를 이어가며 살았다. 이 고택은 세분의 판서를 비롯하여 조선개국 일등공신 정도전, 사헌부 지평 황전, 집현전학사 김증 등 수 많은 학자와 명신들을 배출한 곳일 뿐만 아니라 경향각지의 많은 선비들과 교류한 조선시대 명문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삼판서고택은 구성공원 남쪽 (현 영주동)에서 영주선비의 표상으로 수백년을 이어져 오다가 1961년 대홍수로 기울어지고 수년 후 철거 되었다가 2008년 10월 서천이 내려다보이는 이곳 구학공원에 복원되어 ‘선비의 고장’ 영주를 상징하는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가학루
(駕鶴樓)
구성공원 정상에 높다란 누각이 있는데, 이 누각을 『가학루』라 불러 오고 있다.
전해오는 영천군지에 의하면, 이 누각은 본래 조선시대 영천군 동헌의 문루(門樓)로서 영주초등학교(옛 영천군 관아 터) 뜰에 있었는데, 1923년 군수 전성오(全省吾)가 구성공원 으로 옮겨 세웠다.
이건기(移建記)에 의하면, “이 누각은 옛 동헌의 바깥 문루로서, 학교 운동장을 넓힘에 있어 부득이 철거해야 할 사정이므로, 이건위원회를 구성 하여 관민이 물력(物力)을 내어 구성공원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가학루 전면 편액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이며, 후면 편액은 소우(小愚) 강벽원(姜璧元)의 글씨이다.
향서당
(鄕序堂)
구성공원 입구 오른편에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당이 있는데, 고려 공민왕 20년(1371년) 군수로 부임한 하륜(河崙)이 이곳에 『향서당』을 세워 고을 선비들이 공부를 하고, 고을 원로들이 모여서 풍속과 질서를 바로잡는 일을 의논하면서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15년(1433년) 군수 반저(潘渚)가 보수하고 규모를 늘렸는데, 그 후, 세조 때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고을 동쪽 5리 안에 정자가 없어 고을을 찾는 손님을 마중하고 배웅하기가 어려워 고을 유지들과 의논하여 기금을 모아 규모를 확장하여 증축하였다.
왜정시대 일본인들이 이곳을 절로 사용하다가, 약 90여 년 전 이 향서당건물을 뜯어서 석공임무소 자리로 옮겨 불상을 모시고 포교당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이 건물을 영천군 봉향면사무소로 사용하다가 1940년 11월 1일 영주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영주읍사무소로 사용하게 되자, 포교당은 다시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으며, 옛 향서당 건물은 석공임무소 사무실 증축으로 헐어져 없어지고 말았다.
성밑
(城底)
구성공원 입구 포교당 앞에서 남쪽 봉송대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성밑(성저)城底』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이 옛날 구성산성(龜城山城) 아래 있다고 하여 『성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재인촌
(才人村)
포교당 오른편에서 불바위 사이에 오래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재인촌(才人村)』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에 가축을 도살하는 사람(재인) 들이 살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재인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말, 영주역이 신영주로 이전하면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흩어지고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불바위
(火岩)
기독병원 앞 길 건너편 골목으로 약 50m 쯤 가면 구성공원 산자락에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 바위를 『불바위』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바위 봉우리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뒤새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원인 모를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한 풍수장이가 이 고을을 지나다가 이 바위를 쳐다보고 “저 바위 봉우리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하고 있어 고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풍수 장이에게 불이 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더니, “바위 서편 아래에 널따란 못을 파서 물을 가득히 채우면 불기운이 약해져서 고을이 평안해진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바위 서편 아래에 넓고 깊은 못을 파서 물을 가득히 채워 놓았더니, 그 후 부터는 고을에 큰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바위 아래 파놓았던 못은 고을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녁 서(西)·못 지(池)자를 써서·지(西池)라고 불렀는데, 1961년 7월 11일 영주 대홍수로 인하여 없어지고 지금은 단독주택이 들어서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이 바위 봉우리가 마치 짐승의 뿔(각角)을 닮은 형상이라고 하여 『뿔바위(각암角岩)』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봉송대
(奉松臺)
소디프신소재 기숙사 뒤편으로 시민회관 방향으로 가는 길 왼편에 우뚝솟은 바위봉우리 위에 정자가 있는데, 이곳을 『봉송대』라 불러오고 있다.
원래 이 봉송대는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에 있었던 것을 영주에 사는 안동권씨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시대 좌사간(左司諫)을 지낸 안동권씨 정定이 고려가 조선에 망하자, 고려 왕조를 받들어 모신다는 뜻으로 송도(松都)(고려의 수도)를 그리워『봉송대(奉松臺)』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쪽박소 봉송대 암벽 아래에 옛날 서천의 물길이 흐르고 있을 때, 세찬 물길이 소용돌이치며 감도는 깊은 소(沼)가 있었는데, 이 소(沼)를 『쪽박소』라 불러오고 있으며,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주민들이 낚시와 뱃놀이를 즐겼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해마다 여름이 되면 멱을 감던 많은 사람들이 이 소沼에 빠져 목숨을 잃었기에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 소(沼) 가까이에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구호동
(鷗湖洞)
봉송대 오른편 옆길을 지나가면 구성공원 서편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구호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정조 때 향내(鄕內)유림에서 세운 구호서원(鷗湖書院)이 언덕위에 있었다고 하여 『구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반구정
(伴鷗亭)
봉송대 옆을 지나 약 100m 즘 가면 구성공원 서편 끝자락 둔덕에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34호로 지정된 옛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을 『반구정』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말 충절을 지킨 좌사간(左司諫) 권정(權定)이 옛 고려(高麗)로 돌아온다. 라는 뜻으로 반구정(返舊亭)으로 명하였으나 후학들이 왕의 미움을 살 것을 우려하여 반구정(伴鷗亭)이라 칭하였다고함, 조선 정조 4년(1780년) 안동권씨 후손들이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에 있던 정자를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없어진 구호서원(鷗湖書院)이 이곳 옆에 있었다고 한다.
동구대
(東龜臺)
아카데미여관 뒤편으로 시민회관 방향으로 가는 길 왼편에 우뚝솟은 바위봉우리 위에·봉송대가 있는데 이 봉우리를 『동구대』라 불러오고 있으며, 중앙선 철길 건너 영주2동사무소 뒤편 대순진리회 교당 뒤편에 있는 바위 산 둔덕을 『서구대』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태종 때 지금의 구성공원이 마치 거북이 형상이라고 하여 영주를·구성(龜城)이라 불렀는데, 당시 서천 물길이 시민회관 앞을 지나 상공회의소 앞으로 흘러내릴 때 동쪽에 있는봉송대 바위 봉우리가 마치 거북이가 물을 찾는 형상이라 하여『동구대(東龜臺)』, 대순진리회 교당 뒤편 산 둔덕 바위는 서쪽에 있는 거북이가 물을 찾는 형상이라 하여 『서구대(西龜臺)』라 불렀다고 한다.
구성
오거리
농협영주시지부에서 성누가병원 방향으로 약 300m 쯤 가면 공설시장·성누가병원·영주농협·영주우체국 방향으로 연결되는 다섯 갈레길이 있는데, 이 길이 구성공원과 연결된다고 하여 『구성오거리』라 불러 오고 있다.
구-예천
통로
구성오거리에서 가고파극장·삼성생명(뒷편)·소디프신소재 기숙사까지 연결되는 좁은 도로가 있는데, 이 길을 『구-예천통로』라 불러오고 있다.
원래 이 길은 영주에서 예천 · 상주 방향으로 가는 외통길로서 지금의 넓은 도로가 생기기 전에 삼양자동차정비공장 방향으로 연결되어 예천으로 가는 길이었다고 하여 『구-예천통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