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 1980. 04. 01
- 영주읍 휴천1리, 문수면 적서리, 이산면 조암리 편입
- 영주시 휴천3동으로 행정구역 조정
지명유래
- 원래 영천군 봉양면의 땅으로서 마을앞을 흐르는 내가 자주 말라 붙어 물이 흐르지 않을 때가 많아, 내가 쉬어 흐른다는 뜻으로 휴천이라 하였으며, 지천이라 불리기도 하였음
법정동 | 지명 | 명칭 유래 |
---|---|---|
조암 (槽巖) |
조선 영조때 영천군 산이면(山伊面) 조암방(槽巖坊)에 속하였다 1914. 3. 1 행정구역 개편시 영천군 산이면 상구동(上舊洞) 일부와 초곡동(草谷洞)과 어화면(於火面) 조암동(槽巖洞)이 합하여 영주군 이산면 조암리가 되었다가 1980. 4.1 행정구역 개편시 영풍군 이산면에서 영주시 휴천3동에 편입되었다 | |
조암동 (槽岩洞) |
전단 (箭丹) |
복상골 입구에서 농로를 따라 400m쯤 가면 교회가 있는 마을이 있는데 조선 중종때 단양군수 신세인(申世仁)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피난 길에 가족을 데리고 죽령고개에 올라 소백산신령님께 피난처를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한 후 화살에 붉은 헝겊을 매달아 남쪽으로 향하여 써았더니 이곳에 닿았다고 하며 그래서 가족들을 데리고 화살을 찾아 살게 된 곳이라고 하여 화살 전(箭) 붉은 단(丹)자를 써서 전단이라 하고 평산신씨들이 사는 마을을 웃전단이라 함. |
행재골 | 동수나무 입구에서 동쪽 농로를 따라 약 600m쯤 가면 왼쪽 산 아래 두 개의 작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아래 행재골, 웃 행재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비슷한 골짜기가 둘 있으므로 형제골이 변하여 행재골로 불리는 듯 하다 | |
아랫전단 | 행재골 입구에서 동쪽 농로를 따라 약 200m쯤 가면 인동장씨 최락당(最樂堂)이 있는 작은 마을이 전단마을 아래에 있어 아랫전단이라 하며 이 마을은 인동장씨 일족이 처음 터전을 이루어 살면서 마을 한 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일이 화살처럼 빠르게 흐른다고 하여 전계(箭溪)하로 불렀다고 하는데 후에 웃전단과 구별하여 인동장씨들이 사는 마을을아랫전단이라고 불러옴 | |
사일 (沙日, 沙逸) |
수청거리 마을 앞 국도에서 오른편 사일교를 건너 왼쪽 농로를 따라 약 400m쯤 가면 경북선 철길 옆에 작은 마을을 사일이라 하며 조선 선조때 임진왜란을 피해 경남 의령에 살던 오운(吳澐)이 이 곳에 이주하면서 마을앞 서천의 고운 모래가 햇빛에 아름답게 반짝이다 하여 모래 사(沙) 해 일(日)자를 써서 사일이라 했으며, 또한 상류보다 이곳 하천 폭이 넓어 물살에 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일(沙逸)이라고도 한다 | |
초곡 (草谷) |
조선시대에 고창 오(吳)씨가 이 마을에 처음 정착 했을 때 숲이 울창하여 초곡이라 했으며 남평문씨로 창계 문경동이 우서하였으며 사위 김해허씨가 살다가 퇴계 이황이 이 마을 김해 허씨(첫번째 부인) 집안으로 장가든 곳임 | |
옹기점 | 수청교 신호등에서 왼편 산 아래로 새로 생긴 포장도로를 따라 약 200m쯤 가면 중앙선 철길 왼쪽에 백인회관으로 사용되던 의성김씨 종친회관 건물이 있는데 이 주변을 옹기점이라 불러오고 있다. 옛날 이 곳에 옹기굴이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옹기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
독주골 (獨朱谷) |
조선 초기 웃전단 마을에 전라도 화순에서 이주해 온 주견용(朱見龍)이 살았는데 관아의 부역도 하지 않고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자 어느 날 원님이 군졸들을 시켜 동헌으로 잡아오게 하여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수 년동안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느냐?고 묻자 하는 말이 우리는 대국사람으로서 조선 땅에 피신하여 사는데 어찌하여 세금을 내라고 하십니까?고 반문하였다, 이를 이상히 여긴 고을 원이 너가 어찌하여 대국사람이라고 하느냐?고 호령하니, 나는 원래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의 후손으로서 청나라에 의해 명이 망하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조선 땅으로 피신하여 전라도 신안군에 살게 되었는데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하여 주씨(朱氏)들을 또 다시 죽이려고 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이 곳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한다. 이런 가련한 이야기를 듣고는 이들에게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 주고, 주씨들만 한 곳에 모여 살도록 하면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 | |
수청(水靑) 거리 |
남산고개에서 안동방향으로 약 200m쯤 가면 왼편 철길 건너 큰 마을이 있는데 옛날 마을 앞으로 서천이 흐르고 주변에 물푸레나무가 무성하여 물 수(水) 푸를 청(靑) 자를 써서 수청이라 했으며, 마을 앞에 큰 도로가 생기면서 길손들이 쉬어가는 주막점이 있게되자 마을 이름이 됨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마을 뒷산이 마치 채반(채다리) 형상을 하고 있어 흰 물이 나오는 공장을 세우면서 부자가 된다고 하였는데 약 40여년 전에 어떤 사람이 한지공장을 세워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지금도 한지공장이 있다 | |
노루고개 [獐峴] |
윗행장골에서 북쪽으로 약 40m쯤 가면 산 아래 있는 큰 마을을 말하며 약 300여년 전 순흥 안씨, 청도 김씨, 안동 권씨, 의령 여씨 이렇게 네 성씨가 마을을 이루어 살았고 당시 마을 뒤편 산언덕이 마치 노루가 누워있는 와록형(臥鹿形) 이라고하여 마을 이름이 됨 | |
적서동 (赤西洞) |
조선 영조때 영천군 적포면(赤布面) 적포리에 속하였다 1914. 3. 1 행정구역 개편시 영천군 적포면 적서동과 권선면(勸善面) 본리 일부가 합하여 영주군 문수면(文殊面) 적서리가 되었으며 1980. 4. 1 행정구역 개편시 영주시 휴천3동에 편입되었다 | |
적서동 (赤西洞) |
서원마 | 문수방향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와현쪽으로 중간지점에 있던 작은 마을인데 이 곳을 서원마라 불러오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곳에 병자호란 3학사인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를 제향하는 장암서원이 있었던 곳이다 |
연동골 (蓮洞谷) |
서원마을에서 농로를 따라 서쪽으로 약 200m쯤 가면 오른편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연동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마을 가운데 있는 정자옆 작은 연못에 연꽃이 많아 연꽃 연(蓮) 못 당(塘)자를 써서 연당골이라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발음이 변하여 연동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함 | |
아치나리 (鵝川) |
연동골 마을 입구에서 왼쪽 농로를 따라 약600m쯤 가면 산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아치나리라 불러오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 중종때 김영균(金永鈞)이라는 선비가 터전을 이루어 살면서 마을 앞 시냇가에 백로 같은 철새가 많이 날아들어 거위 아(鵝) 내 천(川)자를 써서 아천이라 불렀다 그 후 발음이 변하여 아치나리라 불리어졌다 이 마을은 석당(石堂) 김종호(金宗鎬 1901~1985) 서예가의 마을이다 | |
거촌 (巨村) |
독지골 입구에서 문수 방향으로 약 500m쯤 가면 오른편에 영주시환경사업소가 있는데 이 곳을 거촌이라 불러오고 있다. 옛날 이 곳에서 옥천 전씨들이 큰 마을을 이루면서 살았다 하여 큰 마을[巨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
질바들 (陶坪) |
적서교를 건너가면 ㈜노벨리스코리아 알루미늄공장이 있는데 이곳을 질바들이라 한다. 옛날 이 곳에 공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질그릇을 만드는 진흙이 많이 나오고 비오는 날은 온촌 질펀하다고 하여 질그릇 도(陶) 들 평(坪)자를 써서 도평(陶坪)이란 뜻으로 질바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
적서 (赤西) |
방갓마을 주변 전체를 적서라 함 | |
방갓 (栗枝) |
국도 5호선 남쪽 인터체인지에서 서천을 가로지른 적서교를 건너가면 ㈜노벨리스코리아가 있고 그 곳에서 강변길을 따라 약 700m쯤 가면 오른편 산 아래 있는 마을 | |
자라못 | 연동골 마을 안에 있는 못 | |
휴천동 | 화리미 (花林) |
KT에서 안동 방향으로 300m쯤 가면 왼편에 천태종 운강사(運降寺)가 있는 마을을 말하며 옛날 이 골짜기에 복숭아나무가 많아 봄이면 꽃으로 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꽃 화(花) 수풀 림(林)자를 써서 화림 또는 화리미라 부르게 됨 |
돌고개 | 화리미마을에서 휴천1동 장방골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며 이 고개마루 주변이 모두 바위로 얼기설기 이어져 있어서 부르게 됨 | |
남산고개 | 남산현대아파트를 가려면 신호등에서 기다려야하는데 이 곳을 말하며 옛날에는 시청과 지천마을 뒷산이 이어져 있어 영주 남쪽에 있다고 하여 남산고개로 부르게 되었으며 1941. 7. 1. 영주-안동 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산허리를 잘라 도로와 철길이 개설되어 차량이 다니는 오르막 고개가 되었다 | |
삼각지 마을 | 대한노인회영주시지회 뒤편 강릉가는 영동선과 청량리가는 중앙선, 그리고 옛 영주우체국 부근에서 주앙선에서 영동선으로 이어지는 철로가 1960년대 삼각형 모양을 이루었고 그 사이에 마을이 있어서 삼각지 마을로 부르게 됨 |